한국전쟁고아 및 미국•영국 한국전쟁포로들의 인적 서류

요안나 호사냑 (Joanna Hosaniak) 박사

알려지지 않은 인간사의 흔적

1950년대 폴란드 비밀기관 기록자료에 포함된
폴란드 거주 한국전쟁고아 및 미국•영국 한국전쟁포로들의 인적 서류

2017년, 남한 정착 탈북대학생그룹이 폴란드 국가기억원(IPN)의 지원을 받아 북한인권시민연합이 기획한 폴란드 내 전환기 정의 구현 (Transitional Justice)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했습니다. 본 프로그램을 통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와 크라쿠프도 방문했습니다. 그곳의 활기 넘치는 할머니 폴란드 가이드는 탈북학생들에게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2차 세계대전 때 고아가 되어 크라쿠프 고아원으로 보내졌는데, 그곳에서 몇몇 한국전쟁고아들과 방을 함께 사용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녀는 배운지 몇 십 년도 더 지난 한국어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폴란드 공산당 매체의 선전자료와 ‘형제의 도움’을 강조하던 시기의 기록들을 제외하고, 폴란드 내 대규모 한국전쟁고아 집단의 존재는 몇 십년 동안 주로 비밀로 다루어졌고, 폴란드 라디오 기자이며 작가인 욜란타 크르소바타(Jolanta Krysowata)씨가 브로츠와프의(Wrocław) 묘지에서 김귀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13살 소녀의 무덤을 발견하기 전까지 잊혀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북한 아이들의 보육사, 의료진 및 교사였던 사람들을 찾기 위한 조사를 시작하였고, 조금씩 진실을 파헤쳤습니다. 밝혀진 사실들은 유명한 다큐멘터리 영화와 책이 되었습니다.

최근 추상미씨가 제작한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라는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는 크르소바타씨의 조사를 보완합니다. 영화는 북한의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탈출해 최근 남한에 정착한 젊은 세대 북한 고아 이야기를 통합시켜, ‘한국전쟁 당시 폴란드로 보내진 북한고아’라는 주제를 현대적으로 전개했습니다. 젊은 세대의 한 탈북 고아가 추상미씨를 따라 폴란드 실레지아 남부의 프와코비체에 남겨진 첫 북한 고아들의 발자취를 쫓았습니다. 크르소바타씨에 따르면 프와코비체에는 가장 대규모 그룹이었던 1270명 북한 아동들이 일반 대중들과 떨어져 고립된 특별 기숙학교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추적된 고아 대부분은 실레지아 남부 (프와코비체 – Płakowice, 츠클라스카 포레바 – Szklarska Poręba, 바르다 – Barda)의 몇몇 지역에 살았으며, 일부는 바르샤바 근교 (시비데르 – Świder, 오트보츠크 – Otwock, 팔레니차 – Falenica) 일반 고아원에 머물렀습니다. 출처에 따라 아동의 총 인원수는 1,500 에서 1,720 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 보내진 7~15세 사이의 아동 및 청소년 무리는 폴란드에 1951년 도착했다고 밝혀졌습니다. 북한 관리를 동반한 후기 그룹 대부분은 1953년에 도착했으며, 마지막 그룹은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59년 북한으로 되돌려 보내졌습니다.

본 프로젝트 진행 과정 중, 여러 도시 IPN 지부의 IPN 기록보존소들에 대한 심도 깊은 조사를 통해 크라쿠프 IPN으로부터 일련번호가 있는 북한 유소년의 서류 약 100개를 받았습니다. 관련 서류들은 1952년도부터 1959년도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그 자료에 따르면, 가장 연소자는 1940년도 출생이며, 가장 연장자는 1933년 생으로, 1952년 당시 12~19세 사이였습니다. 이 그룹의 서류에는 몇몇의 20대 북한 출신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인적서류들은 모두 크라쿠프에서 왔지만, 표기된 거주지는 크라쿠프, 흐샤누프 (Chrzanów, 크라쿠프 근교도시), 우치 (Łódź)로 달랐습니다.

(김일성이 1951년 폴란드로 보낸 북한고아그룹 중 한 명의 개인등록서류. 이들은 1954년부터 1955년 사이의 기간동안에만 바르샤바의 북한 대사관에서 북한 신분증 (여권)을 발급 받았음).


그 인적서류들에는 1951년 폴란드에 도착한 아동들의 등록 서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가장 알려지지 않은 그룹이며, 그들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인적서류에는 그들이 테레스폴 (Terespol, 벨라루스와 국경도시)을 통해 1951년 11월 22일과 23일 국경을 넘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들이 바르샤바의 북한 대사관에 등록된 것은 대사관이 그들에게 여권을 발급해주던 때와 같은 1954년과 1955년이 처음이었습니다. 몇몇 등록증은 아이들이 바르샤바와 시비데르, 또는 치에하노프 (Ciechanów)와 흐샤누프에 1951년부터 1954년 까지 거주했다는 정보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첫 등록은 크라쿠프, 우치 또는 흐샤누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아이들이 누구였는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서류에 종종 그 학생들이 고아임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몇몇 아이들의 출생지는 ‘Kitai’ (러시아어로 중국 의미)로 기록되었으나, 출생 국적이 북한으로 표기된 것을 보면 이 초기 그룹에 항일 무장독립운동가의 자녀들이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예를 들어, 김일성은 1930년대 수감되기 전과, 이후 소련 붉은군대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라브렌티 베리야(Lavrentiy Beria)가 그를 발탁한 이후에 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단을 운영했습니다. ‘중국출생’으로 표시된 아동의 서류 주석에는 그 아동의 부모가 군사활동 중 전사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그룹에 속한 아동 중 매우 소수의 서류에는 현재 남북으로 나뉜 강원도 지방이 출생지로 적혀있으며, ‘모친, 폭격 중 사망’과 같은 주석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그룹 안에는 자신의 출신 도 또는 도시는 기억하지만 부모님 중 한분 또는 두분 모두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본 거주지 주소를 기억하지 못하는 아동들도 있었습니다.

관련 IPN 서류에 따르면, 다른 학생 무리는 1953년 9월 폴란드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15세, 16세 소년들이었고, 크라쿠프시 근처의 미실레니체 (Myślenice) 군경의 등록서류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그룹은 이후 금속공학 공부를 위해 노바후타 (Nowa Huta)의 직업기술고등학교에 등록할 수 있도록 크라쿠프로 보내졌습니다.

1953년 7월과 1954년에 북한에서 여권을 발급받은 성인 학생들의 서류도 있습니다. 이들은 20대 초반, 나이 많은 학생 그룹으로 폴란드 유학을 위해 보내졌습니다 (이들의 등록증은 바르샤바와 우치에서 옴). 몇몇 서류들은 견장을 단 제복 또는 종종 훈장을 단 잘 차린 정장 차림의 남성 사진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정전협정이 거의 끝나가던 때와 한국전쟁 말기, 평양에서 여권을 발급받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아마 군사 경찰 인력 중 선발된 개인으로 특별 훈련 목적으로 북한정부에 의해 보내 졌음을 암시합니다. 다른 비슷한 서류로는 1952년 1월에 도착해 크라쿠프에서 등록된 몇몇 성인과 관련된 서류가 있습니다. 그 서류에는 “1950년-1951년 군사복무”와 같은 주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고아 서류’와는 다르게, 이 그룹 사람들의 서류에는 무엇을 공부할지 표기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등교육부의 특별장학금이 언급되었습니다.

아직까지 다른 어떠한 연구에서도 크라쿠프나 근처 도시의 고아들을 다룬 적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발견은 이 글의 첫머리에 크라쿠프 지역에도 북한 학생들이 있었음을 언급한 이야기와도 상응합니다. 관련 서류들에 미루어보아 1951~ 1953년 사이 청년 그룹들이 폴란드로 보내졌으며, 그들이 아직 연구되지 않은 크라쿠프, 흐샤누프, 미실레니체, 우치, 치에하노프 같은 다양한 지역에 거주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들이 폴란드에 보내진 북한아이들의 숫자 통계에 이미 포함된 그룹 중의 일부인지, 아니면 폴란드로 보내졌으나 알려지지 않은 그룹으로 현 통계보다 더 많은 수의 아이들이 폴란드로 보내 졌음을 시사하는 것인지 밝히는 것은 이후에 더 연구되어야 할 것입니다. 당시의 공산당 신문을 포함해 더 많은 기록 자료가 다양한 기록보존소에서 밝혀지며, 본 조사결과가 진실을 밝히려는 연구의 확장에 기여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는 특별 정치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청소년들과 관련해 근무했던 사람들은 그 청소년들에 대한 정보의 대중 공개 금지 서약을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 포함된 청소년 관련 자료들은 지방도시 공공 보존 기록관 같은 곳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공산당 보안기관의 서류에 기록되어 있는 북한 시민의 성명 색인 존재는 놀랍지 않습니다. 최소한 지역 내 거주 외국인 등록 목적에서 외국인은 비밀경찰 내부조직의 관심사였기 때문입니다.

조사결과물은 개인의 이름과 생일 자료 및 북한 내 출신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이름들은 폴란드어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한국어 서명이 서류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경우 한국어로 이름이 어떻게 표기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폴란드어를 영문으로 바꾸며 생길 수 있는 추가적인 오류 방지를 위해 영문 및 국문본 북한관련기록물 목록에는 폴란드어 표기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출생지가 남한으로 적혀 경주와 같은 남한의 도시가 언급된 사례가 드물게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표기가 실수로 일어난 것인지, 또는 피난 가던 일반 시민들이 어디인지를 모르고 한반도의 남북 사이를 계속 오가는 것이 만연해지고 남한과 북한을 혼용하였기 때문인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그 젊은이들이 북한군에 붙잡혔을 때, 그들은 아마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크르소바타씨가 한국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 “그 청소년 모두가 북한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한 경고를 재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북한 보안기관이 전쟁 기간 동안 한반도 전역의 전쟁터에서 사람들을 잡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북한 정권은 한국전쟁 초기 대규모의 민간인 납치로 유명합니다. 공산당 보안기관들은 의도적으로 집과 직장에 있는 약 10만 명의 남한 국민들을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들 중 다수는 간호사, 의사, 경찰 또는 사업가로, 북한에 도움이 될 만한 기술을 보유한 일반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행방불명이며, 이러한 북한의 의도적 민간인 납치는 2014년 UN 북한인권조사위원회 보고서에 반인류범죄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의 질문들이 제기되어야 합니다. 그 청소년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어떻게 북한군에 붙잡혔고, 그 작전의 본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폴란드에 있던 북한으로 돌아간 뒤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최근 몇 년간, 몇몇 폴란드 언론들은 기사를 통해 북한으로 송환된 청소년들이 폴란드인 보육사에게 보내온 오래된 편지들을 다뤘습니다. 편지를 통해 아이들은 폴란드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표현했으며,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그 중 소수의 아이가 실제로 북한을 벗어나 폴란드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했다고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저는 폴란드를 오랜 기간 생각했었고, 탈출을 생각했습니다. 제발 저에게 화내지 마세요, 아버지. 그저 저를 위해 행복한 성탄절을 준비해 주세요. 여기에서 행복한 휴일을 보내지 않을 겁니다. 제발 아무에게도 이것을 이야기 하지 말아주세요 아버지. 우리는 북한으로 돌아간 후 너무 힘든 시기를 보냈어요. 우리는 앉아 있어야만 했고, 그들은 우리에게 근 열흘간 소리 질렀어요. 그리고는 경찰이 우리를 학교로 데려갔습니다. 거기서 그 사람들은 다시 고함을 쳤어요. 이제 저는 석탄 광산으로 보내지기 위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몇몇 폴란드 보육사들은 당시 최고조에 이른 공산당 감시 하에서 아이들의 운명을 걱정하며 아이들에게 연락을 권장하지 않았습니다. 1962년경 부터는 북한에서 더 이상 편지가 오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조금 많았던 소수의 아이들은 간첩이나 번역 목적으로 분명히 공산주의 당원이 되었을 것입니다. 폴란드 직업학교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직업 선택이 허락되지 않았고, 북한 대사관의 요구에 맞추어, 북한에서 정해진 제한된 직업 기술을 배우도록 지시 받았습니다. 가장 나이 어린 그룹의 소년과 소녀들은 금속공학 직업기술고등학교와 기계학 직업기술고등학교에 등록시킬 것으로 IPN 서류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북한에 돌아간 뒤에도 폴란드에서 배운 일을 계속하도록 지시 받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위의 편지가 묘사하듯, 많은 이들은 석탄 광산으로 보내졌을 수도 있습니다.

전쟁 후 초기 몇 년간, 북한은 정치적 성분이 좋지 않거나 정권에 불충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주로 광산에 보냈습니다. 몇 천명의 남한 출신 전쟁포로들 역시 북한 주요 광산으로 보내졌습니다. 이동은 제한되었고, 남한으로 돌아가는 것은 절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노령으로 인한 절박함 속에서, 죽기 전 고향의 가족이 보고 싶어 탈북해 최근 남한으로 돌아온 매우 제한된 몇 명과의 개인적 인터뷰 (작가에 의한 것 포함)를 통해 그들의 운명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연이은 남한 대통령들이 남-북 대화에서 전쟁포로 귀환을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후, 모든 희망을 잃고 탈출을 결심했습니다.

이 아이들의 운명이 6.25 전쟁 납북자 및 남한 전쟁포로들의 운명과 대개 비슷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결국, 전쟁으로 가족이 죽임을 당하거나 흩어진 아이들은 북한비밀경찰기관의 쉬운 표적이 되었습니다. 김일성과 스탈린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인해, 몇 천명의 납치된 남한 민간인들처럼 커다란 정치 계획의 일부가 된 이 어린 생명들은 전쟁이나 전후 복구에 동원될 수 있을 때까지 교육받고 관리될 수 있도록 모아지고, 보내졌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떠나던 때는 전쟁의 종말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던 시기였습니다.

청소년 교육과 준비를 통해서뿐만이 아니라 한국전쟁에 가능한 군사지원을 위해, 모든 유럽 공산주의권을 동원하여 한국전쟁을 지원하려던 당시의 더 거대한 계획에 이러한 아이들이 적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폴란드는 공식적으로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폴란드 국방부는 한국전쟁에 참전할 군 인력 훈련을 목적으로 ‘2000부대 (Unit 2000)’를 1952년도에 비밀리에 설립하였습니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될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 부대는 중립국감독위원회 직원으로 배정되도록 재배치되었습니다. 그들은 안둥 (현 단둥)에 주둔하다가 한국 정전협정이 체결된 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IPN 역사가에 따르면 그 부대는 스탈린 주도로 설립되었습니다. 스탈린은 공식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은밀히 다른 국가들을 조종하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방법 중 하나는 소련 당국의 종속적 위치에 있는 타국의 비밀기관 및 군사 비밀기관을 활용하는 것 이었습니다. 대개 초기 공산주의가 자리잡아가고 있을 때, 이러한 나라들의 국가 첩보기관에는 소련 장교들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스탈린의 명령으로 1949년 폴란드 국방부 장관이 되어 1952년 2000부대를 창설한 콘스탄틴 로코솝스키(Konstanty Rokossowski)는 소련 붉은 군대 원수였으며, 제 2차세계대전 중 가장 유망한 지휘관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1956년 폴란드에서 직위 해지 후, 소련으로 돌아왔습니다.

소련에 대한 폴란드와 북한의 종속적 위치는 한국전쟁 동안 북한에 배치된 폴란드 공산당 보안기관원의 보고서에서도 나타납니다. 가장 초기 서류들은 1950년대 초기 폴란드 기관들이 북한 주둔을 시도하던 때 (본래 장교들은 베이징에 주둔하며, 북한을 오갔음) 작성되었습니다. 몇몇 서류들은 사절단 파견에 앞서 소련 및 중국 장교들과의 상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른 서류에는 한국전쟁 중 소련과 중국 장교들이 평양의 일을 직접적으로 관리하던 때, 다른 유럽 공산주의 국가의 군사 기관직의 인원들은 평양 외의 지역에만 주둔이 허용되며 김일성의 특별 허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잦은 평양방문은 불가능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초기 폴란드 대사관 및 폴란드 국방무관은 당시 운영 중이던 몽골 대사관,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임시대리대사들과 함께 북-중 국경 지역인 만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당시 폴란드는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크게 파괴되어 매우 빈곤한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몇몇 서류들은 폴란드 군 비밀경찰이 조직했던 한국전쟁분쟁지원 기금모금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1951년 5월 82개의 화차에 담겨 김일성에게 보내진 미확인 자재 수송에 관한 보고도 담겨 있습니다.

한국전쟁기의 서류 중 가장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아마 다른 무리의 사람들, 미국•영국 전쟁포로에 관한 서류일 것입니다. 북한과 중국 비밀기관이 준비한 서류철에는 개인사진이 첨부된 각 군인들의 서류가 담겨 있었습니다. 원본 서류들은 수감자를 면담한 담당자들의 수기로 작성되어 중국어와 한국어로 표기되었습니다. 그 내용들은 이후 한국어에서 러시아어로 입력되었는데, 이는 소련 기관의 존재 때문일 수도 있고, 당시 공산당 첩보기관의 공식 언어가 러시아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북한보안기관이 북한에 주둔 중인 폴란드 군 기관에 전달하기에 앞서 전체 전쟁포로가 담긴 목록이 영어로 작성되어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북한 및 중국 비밀 기관이 작성한 미•영국 전쟁포로 개인의 면담기록 및 인적서류, 폴란드 공산당 비밀 기관에 송부된 폴란드 출신 전쟁포로의 전체 목록 발췌).


다른 보고서에서는 폴란드 군사 보안요원이 전쟁포로를 군대에 포섭하고 석방 후 본국에 돌아가 공산당보안기관과 협력할 수 있도록 심리를 조작하는 방법에 관한 중국어 기밀 보고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관련 활동들은 대부분 하위직 또는 하층사회계급 군인들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IPN 서류에서 모든 미국•영국 전쟁포로들은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병사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폴란드계였습니다. 이는 폴란드 비밀기관이 관련 인적 서류를 받은 유일한 기관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인적 서류가 보내진 전쟁포로들은 모두 폴란드 출신 부모의 자녀였으며, 서류 안에는 군인 또는 그 가족의 물질적 또는 사회적 지위에 대해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공산당 첩보기관이 선택적으로 노동자 또는 농민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목표로 삼은 것은 분명합니다. 이 모든 서류들은 1952년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추가 연구에 따르면, 이런 군인들은 중립국송환위원회가 일을 시작한 1953년 송환된 군인 목록에 포함되었습니다.

북한 비밀기관이 이런 자료들을 폴란드 기관에 보낸 목적은 알 수 없지만, 그 존재는 각국의 공산당 비밀경찰 기관이 갖고있는 하나의 공통된 특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 생명 가치에 대한 존중 부족입니다. 개인은 그저 서류 기록이며, 잔혹한 정권의 정치 및 보안기관에 쓰일 가능성이 있는 도구일 뿐입니다.

저는 이 글을 한 간청으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지난 15년간 북한인권 옹호를 추진하고 몇 백명의 북한피해자들을 면담하며, 친척이나 지인 중에 북한 고아로 폴란드로 보내진 사람을 아는지를 질문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관련 지식이 있는 분을 단 한 명 밖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만약 본 연구에 언급된 당사자(고아 또는 전쟁포로)이거나 그 친척으로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분이 계신다면, 혹은 관련 서류들을 살펴 보는데 도움을 원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