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국감독위원회 관련 서류

마렉 한데렉 (Marek Hańderek) 박사

폴란드 국가기억원 기록보존소의 중립국감독위원회 관련 서류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군사정전협정 체결 이후 종결되었습니다. 정전협정으로 두개의 한반도에는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군사정전위원회는 유엔사령부에서 지명된 다섯명과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이 공통으로 선출한 다섯명을 합쳐 총 열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북한 입국 후 개성에 도착한 중립국감독위원회 폴란드 대표단)


중립국감독위원회는 정전협정 위반이 보고되는 경우 감시 및 사찰을 실시하였습니다. 관련 사찰은 증강된 전투기, 장갑차, 무기 및 탄약의 한반도 도입 방지를 확실히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중립국감독위원회은 교체가 사람 대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 부대 및 요원 교체를 감시했습니다. 교체는 중립국감독위원회 사찰단 감독 하에 북한내 5개, 남한내 5개의 출입항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중립국감독위원회는 공산진영에서 지명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유엔에서 추천한 스웨덴, 스위스의 총 4개국 대표단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립국감독위원회가 처음 의도된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여러 이유 중 하나는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이 중립적이지 않았으며, 북한이 상세한 사찰을 회피할 수 있도록 도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많은 경우 사찰 진행을 거부하거나, 방해공작을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북한은 비밀리에 기갑 장비 및 대포를 증강할 수 있었습니다.

남한당국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사찰단에 대해 자국 내 첩보 혐의를 제기하였습니다. 당시 남한의 주장은 옳았습니다. 왜냐하면 폴란드 국가기억원 (IPN) 기록보존소에 보관되어 있던 자료들에 첩자 활동 증거가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한 정부는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요원을 남한 영토에서 내보내기 위해, 그들의 영구 주둔지 출입항을 포함, 많은 도시에서 데모 및 반대 시위를 촉발시켰습니다. 마침내, 1956년 6월 유엔은 남한 내 중립국감독위원회 사찰단 활동 중지를 선언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에서도 같은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러한 사건의 여파로, 위원단의 두 한국 내 군사력 증강 방지가 불가능해졌고, 그 역할은 비무장지대 감시로 제한 되었습니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은 북한 지역 비무장지대에 주둔하였고, 스위스와 스웨덴은 남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변화와 민주화가 시작되며, 북한은 그들을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북한은 자국 영토에서 중립국감독위원회 위원들을 철수시킬 시기를 엿보기 시작했습니다. 북한 정부는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가 분리를 기회로, 자국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철수시켰습니다.

1994년 11월 7일 북한정부는 폴란드에 중립국감독위원회 임무 종료를 통보했습니다. 이와 같은 북한 조치가 군사정전협정 위반을 의미한다고 폴란드가 대응하자, 북한은 임무 종료를 더욱 위압적으로 주장하며 1995년 2월 28일 이후 폴란드 군사정전위원회 본부에 전기, 물, 식량 공급을 중단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 없이 폴란드는 대표단을 북한에서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를 제외한 중립국감독위원회는 남한에서 종종 모임을 가졌으나, 그 역할은 실제적인 것보다는 상징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폴란드 국가기억원 기록보존소는 북한과 관련하여 꽤 방대한 양의 자료 모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몇몇은 중립국감독위원회에 관련되어 있으며, 그중 당초에는 북한에 파견될 폴란드 요원 준비를 위해 1952년 조직되었던 제 2000군부대에서 생산된 자료들이 있습니다. 제 2000부대에 소속 되었던 군인들은 이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활동한 국제통제위원회에서도 복무하였습니다. 북한 관련 소장자료들에 군사훈련, 조치, 통신문, 보고서, 장교 인사 정보 관련 자료들의 다양한 서류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우 초기부터 중립국감독위원회에 파견된 폴란드 요원은 비밀기관 정보요원이었습니다. 폴란드 부원 대부분은 군인이었으며, 군사 정보부는 북한에 일반요원보다는 장교들을 더 많이 보냈습니다. 최근 조사결과에 따르면, 일반요원들은 대개 CIA가 실시하는 활동 저지를 위한 방첩 활동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IPN의 기록에서 일반 방첩 요원이 작성한 보고서를 발견했습니다. 그 보고서는 폴란드 단원들과 다른 대표단원 간의 관계, 북한 사람들과 연락 내역, 몇몇 폴란드 대표단원들의 미심쩍은 행동 등 다양한 이슈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많은 서류들은 매우 흥미로우며 예를 들어 공식적으로 선언된 폴란드-북한 친선관계가 실질적으로는 얼마나 복잡했는가를 보여줍니다. 특히, 위원단 설립 이후 초기 몇 년 동안 몇몇 폴란드 부원들은 한국인에 대해 정형화 된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편향된 판단을 이끌었습니다. 의미 있는 예로 첫 폴란드 대표단 부대표 쯔지수왈프 비브롭스키(Zdzisław Bibrowski)대령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일례로, 그는 한국인 가정부를 “지독한 사람에 더러운 여자”라고 묘사했습니다.

반면, 북한이 폴란드를 불신하여, 상호 접촉을 제한 시켰던 기간들도 있었습니다. 양자관계가 최악이었던 기간은 1961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2차 소련공산당대회 이후 시작되었습니다. 대회기간동안, 니키타 흐루쇼프 (Nikita Khrushchyov)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다양한 범죄 가담 혐의를 다시 한번 제기하였으며, 그가 추진한 개인 우상화를 규탄했습니다. 더 나아가 알바니아 노동당이 스탈린주의 정책을 추구한다며 공격했으며, 서구세계와의 공존에 대한 비전을 강조했습니다. 김일성은 이러한 모든 사건과 원칙들을 비난하였으며, 흐루쇼프의 모든 정치 노선을 위험한 수정주의로 여겼습니다.

이후, 북한당국은 모스크바에 순종하는 모든 공산주의 국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었고, 폴란드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평양주재 외교관 뿐만 아니라 비무장지대에 주둔하던 중립국감독위원회의 위원들에 의해서도 감지되었습니다. 그들은 폴란드인과 북한 민간인 간의 접촉 제한을 위해 북한정부가 벌였던 많은 활동들에 대해 기술하였습니다. 폴란드 대표단에서 근무하는 방첩요원은 폴란드 대표단과 연락했던 북한 사람이 처벌되었다고 보고했습니다. 또한 폴란드인과 북한 주민 간 접촉 방지를 위해 주거지를 지날 때 운전자가 속도를 높이도록 요구 받은 것을 지적했습니다. 폴란드 대표단은 지속적인 감시에 놓여, 개인 방 수색 및 대화 내용을 도청당했습니다.

중립국감독위원회의 위장 하에 복무하던 군사정보장교들이 1953년부터 1956년까지 제작한 서류는 특히 더 흥미롭습니다. 그 시기 폴란드는 남한의 5개 출입항에 자리 잡고 다양한 남한 내부 지역의 특별 사찰에 참여하였습니다. IPN에 보관되어 있던 서류들 덕분에, 그들의 주요 임무 및 관심사 지목이 가능합니다. 장교들은 공군기지, 남한 항구에 주둔한 미전함, 극동사령부와 미 제8군 등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미국과 남한 정보요원활동 내용을 알아내고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당시 폴란드가 소련의 충직한 위성으로 역할 했으며 이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1989년 전까지 변함 없었다는 것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폴란드는 소련 정보부와 첩보 관련 자료 및 정보를 공유하였습니다. 심지어 1951년부터 1955년 후반기까지 소련 요원들이 폴란드 군사정보부를 이끌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IPN 기록보존소에 보관된 서류에서 중립국송환위원회의 브와드스와프 트코치니스키 (Władysław Tykociński)를 포함한 몇몇 폴란드 요원 활동을 감독했던 사람이 소련의 콘스탄틴 이바노프 (Konstantin Iwanow) 대령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트코치니스키는 중립국송환위원회 폴란드 사절단의 단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립국감독위원회 부대표가 된 인물입니다. 후에 그는 오랜 기간 외교관으로 근무하다 1965년 미국에 망명을 신청하였습니다. 그는 미국 도착 후, 하원 非미국적 활동조사위원회에 섰으며, 폴란드의 첩보활동 및 한바도 내 활동 등 많은 첩보관련정보를 미국인과 공유하였습니다. 폴란드어로 번역된 그의 증언은 IPN 기록보존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인적사항서류를 포함해 미국 도피 후 수사기간 동안 그에 관해 만들어진 방대한 양의 서류도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후 몇 십년 동안 중립국감독위원회의 비무장지대에 대한 업무를 제한당해, 위원단 소속으로 위장한 군사정보 활동은 감소했습니다. 이는 남한 상황, 한-미 군사훈련, 그리고 다소간의 남북한 관계 정보로 관심사 범위를 축소시켰습니다. 그들의 보고서는 주로 책, 신문, TV프로그램과 같이 널리 이용 가능한 자료에 근거해 작성되었으며 가끔 다른 대표단 협력자들 또는 군사정전위원회 위원과의 대화를 포함했습니다. 관련된 많은 보고서들이 IPN 기록보존소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중립국감독위원회와 일부 관련하여 IPN 기록보존소에 저장된 또다른 자료는 위원회에서 복무한 군인들의 인적 서류입니다. 폴란드는 냉전기 동안 중립국감독위원회에 천명이 넘는 인원을 보냈으며, 그들 대다수는 군인이었습니다. 이는 북한 내 근무 관련 정보를 담은 인적 서류 몇 백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종 개인의 북한 내 임무에 관한 기본적 자료만을 담은 자료들도 있지만, 이력서, 다른 종류의 보고서, 상관 의견서 등 더 다양한 내용을 담은 자료들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된 기록자료 내에는 1953년부터 1987년 까지 한반도에서 촬영된 사진 앨범 8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속에는 총 1,000장이 넘는 사진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사본이 있는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부는 유일한 원본사진입니다. 일반적으로, 그 앨범들은 매우 귀중한 자료들을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우리들은 중립국감독위원회 위원들의 근무 모습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기념일을 기념하는 모습, 마지막으로는 앞에 언급한 것 못지 않게 중요하게 그들이 휴일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임무 수행 중인 중립국감독위원회 위원들의 사진 중 한 부류는 1953년 8월 1일 열린 중립국감독위원회 1차 회기, 출발항으로 떠나는 사찰단, 출발항에서의 활동내용 등을 보여줍니다. 이런 종류의 사진들은 사실 소수를 차지하고, 많은 사진들은 파티나 좀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대표단원들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북한은 종종 폴란드 대표단을 위해 평양, 개성, 금강산 등 북한 내 다른 장소로의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그중 몇몇의 여행 중 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심지어 한 무리의 대표단원들이 일광욕을 하는 모습도 담겨있습니다. 다른 부류의 사진들은 1950년대 각국 대표단 간 스포츠 또는 체스 경기에 참석한 폴란드 대표단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몇몇 사진들과 그룹으로 묶인 사진들에는 설명이 적혀 있습니다. 대부분의 설명은 폴란드 대표단원들이 북한이나 중국, 미국의 대표단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설명에 도움이 될 실례로 “우리의 중국 친구”, “우리의 북한 친구”, “체코슬로바키아 동지의 출발”, 또는 “군사정전협정을 위반한 UN사령부”를 들 수 있습니다.

(북한의 신의주, 청진, 신안주와 남한의 인천, 대구, 강릉으로 보내진 중립국감독위원회 사찰단)


외국 학자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아마 미 함선 푸에블로호 선원 석방 관련 사진 시리즈 일 것으로 보입니다. 소위 “제 2차 한국전”이라 불리는 시기의 중요 사건 중 하나는 1968년 1월 23일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와 82명의 선원들이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치된 일입니다. 북한과 미국간 긴 협상 끝에 미국 선원들은 1968년 12월 23일 마침내 풀려나 판문점에서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 장소에 있었던 폴란드 대표단원들은 이 의미 있는 사건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한반도 중립국감독위원회와 관련해 IPN 기록보존소에 보존된 자료들의 간략한 검토를 정리하며, 이 자료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냉전기 한반도 중립국감독위원회 활동 부분과 관련하여 분명히 새로운 정보를 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관련 자료들은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들에게 유용할 것입니다.

(1968년 12월 23일 Bucher 선장 및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선원들의 석방. 귀환 전, 선원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중립국감독위원회)